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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 정운영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 정운영
Ernesto 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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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없는 시대에 혁명가의 이야기가 가능한가? 이런 질문은 민족해방투쟁의 탁월한 전사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경우가 되면 한결 더 절박해진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게바라는 비교적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두 살 때 발병한 천식이 그의 일생을 괴롭히지만 그는 운동과 여행을 아주 좋아했다. 문학 서적을 탐독하고,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으나, 음악은 백지였다.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라고 부를 만큼 시에 심취하여 로르카, 네루다, 베를렌, 보들레르를 암송하기도 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와 전문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구레나룻을 지운 게바라의 얼굴을 생각하기 어렵듯이 여행이 없는 그의 일생도 상상하기 힘들다. 대학시절 그는 1년 반에 걸쳐 라틴 아메리카 4개국을 도보와 자전거로 순방한다. 졸업 후에 다시 7개국을 여행하다가 그의 인생 여정 자체를 바꾸게 된다. 그는 여행 도중 대륙의 구석구석에서 접한 인간의 질병과 사회의 질병에 깊은 연민과 분노를 느꼈는데, 그 최초의 전기는 1954년 과테말라에서 이루어졌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과테말라 착취의 첨병 미국의 ‘유나이티드 프루트’회사를 국유화하고 그 토지를 빈농에게 분배하는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단행했다. 민중은 밥에 굶주리기보다 인간의 존엄에 한층 더 굶주렸다는 아르벤스의 인민주의 노선에 게바라는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정부가 무너지자, 그는 제국주의의 정체를 목격하고 “혁명적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아무튼 아르벤스의 편에서 싸웠던 그는 반도들의 총구를 피해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뒷날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웠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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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에서 탈출한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서 운명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이 무렵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망명 동지들에 의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체’는 본래 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간투사인데, 그 어원은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라고 한다. 카스트로와의 첫 대면을 게바라는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밤새워 피델과 얘기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쿠바 원정대의 의사로 등록했다. 독재에 맞서 혁명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바 독립의 영웅 호세 마르티의 말대로 “최선의 언어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를 출발한 82명의 대원 가운데 크리스마스까지 쿠바의 거점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집결한 사람은 15명뿐이었고-12명이라는 기록도 있다-그중에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들어있었다. 1959년 혁명군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기까지 게바라는 의사로서 전사로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으며, 특히 그가 지휘한 산타 클라라 기지의 전투는 바티스타 독재를 전복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게바라는 『게릴라 전쟁』을 저술했다. 그는 쿠바 혁명으로 얻은 교훈을 첫째 인민의 군대는 정규군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둘째 봉기 자체로써 혁명의 조건을 창출하고, 셋째 농촌이 무장 투쟁의 거점이라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이런 주장은 전통적 단계혁명론에 의지해온 라틴 아메리카 공산당에는 엄청난 이단이었다. 게바라는 게릴라 투쟁의 이념적 지향이 무엇이든 그 ‘경제적’ 목표는 토지개혁이라고 단언한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중국이 경우도 도시 노동자의 투쟁이 실패하고 그 거점이 농촌으로 이전된 다음에야 승리의 전망이 확보되었는데, 라틴 아메리카 역시 농촌 게릴라 투쟁이 도시 게릴라 전술로 변모하면서 실제로 그 세력과 영향이 크게 감퇴했다.

혁명은 총으로 성취했지만, 그 과업조차 총으로 실현할 수는 없다. 1959년 게바라는 쿠바의 중앙은행 총재에 취임하는데 여기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카스트로가 “자네들 가운데 이코노미스트 없나”하고 묻기에, 게바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카스트로가 “언제부터 자네가 이코노미스트가 되었지”하고 다시 묻기에, 게바라가 “코뮤니스트가 없느냐고 묻는 줄로 잘못 들었습니다”라고 실수를 고쳤으나, 이미 때가 늦어(?) 그는 총재에 임명되고 말았다. 1960년 그는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소련과 중국에 이어 북한을 방문했다. 그 뒤 산업부 장관을 맡으면서 게바라는 농지개혁과 국유화를 주축으로 삼고, 물질적 자극 대신 도덕적 자극을 바탕으로 하는 ‘쿠바식 인간과 사회주의’의 창조를 역설했다. 그는 경제에 코뮤니스트의 혁명성을 강조했지만 반대로 경제는 이코노미스트의 전문성을 요구함으로써, 게바라가 경제를 오해한 만큼 경제도 게바라의 기대를 배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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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회에 참석했다가 아프리카 8개국을 순방하고 귀국한 게바라는 1965년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나는 새로운 전장을 찾아갑니다”라는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기고 갑자기 세인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새로운 전장이란 콩고였지만,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데리고 싸울 수는 없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그의 투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대니얼 제임스의 지적처럼 “혁명은 그를 필요로 하기보다 그가 혁명을 필요로 했기에” 그의 발길은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향했다.

볼리비아의 낭카와수 게릴라 캠프에서 마침내 게바라는 자신의 시대를 연다. 5개국과 국경을 맞댄 볼리비아는 혁명 수출에 최상의 지리적 여건을 구비했고, 그래서 “둘, 셋, 더 많은 베트남을”이란 게바라의 반제투쟁 명제를 실천하는 현장으로 선택된 것이다. 쿠바의 콩고 전장에서 생사와 고락을 같이 한 동료들 포함해서 모두 51명으로 편성된 다국적 민족해방군은 남북 320km와 동서 120km넓이의 해발 2000m정글에서, 1800명의 볼리비아 특공대를 상대로 반년 동안 대소 2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당시 프랑스의 기자 레지 드브레가 게바라를 도운 혐의로 체포되어 30년 징역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그가 거점에 도착하는 1966년 11월 7일부터 사살되기 이틀 전인 1967년 10월 7일까지 치러낸 게릴라 투쟁의 환희와 고통을 생생하게 전한다: “오늘부터 새로운 무대가 전개된다”(1966년 11월 7일), “이것은 대륙 혁명의 새로운 함성이며, 혁명 앞에 우리의 목숨은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12월 31일), “네 명의 동지가 배반할 가능성이 있다”(67년 3월 총평), “게릴라로서 예비시험을 통과한 전사들의 사기는 아주 높다”(4월 총평), “물이 떨어졌으므로 물줄기를 찾을 때까지 하루 종일 숲을 베도록 했다”(5월 2일), “나의 서른아홉번째 생일이다. 세월은 무정하게 흐르는데, 얼마나 더 이 생활을 견딜 수 있을는지”(6월 14일),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여 간과 창자가 파괴되었다. 수 술 도중 그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마치 자식을 잃은 심정이다”(6월 26일), “게릴라 투쟁의 전설이 무르익고 있다”(6월 총평), “이제 스물두 명이 남았는데, 그중 나를 포함한 셋은 무력하다”(7월 총평), “우리가 도착한 지 아홉 달이 된다. 최초의 여섯 가운데 둘이 죽고, 둘이 다치고, 하나가 사라지고, 나는 참을 수 없는 기침에 시달리고 있다”(8월 7일), “덫으로 콘도르와 고양이를 잡아서 모조리 먹어치웠다”(8월 24일), “괴로운 날,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9월 28일), “오늘로 열 한 달을 채웠다. 오전은 목가적인 기분으로 쉬었다”(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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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두 시간동안 벌어진 격렬한 총격전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심하게 기침하던 게바라의 손에서 드디어 카빈총이 떨어지자, 볼리비아 군인들이 그를 체포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는 심문에 게바라는 “혁명의 불멸성을 생각하고 있소”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던 듯하다. 그를 가둠으로써 느끼는 불안보다는 그를 죽임으로써 당하는 비난이 훨씬 가볍다고 생각한 그의 적들이 서둘러 그를 사살했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언젠가 그 혁명의 불멸성을 이렇게 풀이한 적이 있다. “내가 패배해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에베레스트 산정에 도달하려다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지만, 결국 에베레스트는 정복되었습니다.” 사르트르는 게바라를 “이 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했지만, 나는 그의 ‘완전함’보다는 실패를 포함한 그 ‘인간’을 더 존경한다.
 
『한겨레 신문』 1994년 3월 31일